Friday, February 16, 2007

말글 정책의 올바른 방향

말글 정책의 올바른 방향-특정 학맥이 뒤흔드는 말글 정책, 국어 연구원을 개편하자-
김 영환
한글철학연구소 소장, 부경대 교수


문화관광부와 국어 연구원은 지난 10월에 국어 발전 종합 계획을 내놓으며 국어 기본법을 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보도 매체에 공개된 8대 중점 추진 과제를 보면, 대부분 오래 전부터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오른 고전적인 것이다.

공감할 수 있는 내용도 없지는 않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과 넘쳐나는 외국어 문제를 고칠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오늘날 국어 발전을 위협하는 요인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빠져 있다. 또 중국 글자를 섞어 쓰겠다는 뜻이 곳곳에 드러난다. 새로운 내용이 있다면 국립 국어 연구원의 위상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국립 국어 연구원은 그 조직이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방식이 국어학계의 일부 학맥이 좌우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 계획의 기본 정신이 문제다. 해방 후 우리 말글 정책의 근본이라는 한글로만 쓰기를 부정하고 있다. "표준 한자 사전 편찬, 상용 한자 제정" 등의 표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글로만 쓰기는 중화 사상의 독소를 빼내고 한자(중국) 문화권에서 벗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다. 이를 전제하지 않는 국어 연구와 국어 교육은 처음부터 빗나간 것이다. 철저한 한글 전용은 국어 정책의 기본이다.

또 이 법안에 대해 걱정되는 것은 우리 말글의 위협 요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미국말을 배울 필요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데서 온다. 지난날 한문이 신분 상승의 매개물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미국말이 직장에서 능력의 기준이 된다. 각종 공무원을 뽑는 시험에서 미국말이 그렇게 많은 비중을 차지해도 좋은가. 사법 시험 같은 곳에서는 미국말은 거의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이런 각종 국가 시험부터 막연한 통념으로 미국말을 배울 필요를 부풀리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공공연하게 나온 미국말 공용화 논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세계화"로 나타나는 미국의 패권에 순응하자는 이데올로기가 언어 방면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초등학교에서의 미국말 교육이 시작된 것도 "세계화"가 정치 구호가 되던 무렵이었다. 이제는 유치원 꼬마들까지도 미국말을 배우고 있다. 조기 유학을 하는 이유도 미국말이 큰 까닭이 된다.

지난날의 한문 숭배는 이제는 어김없이 미국말 숭배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이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필요한 때이다. 애초에 초등학교에까지 미국말 교육을 해야 한다는 필요를 누구나 절실히 느낀 것은 아니었다. "세계화"라는 뜻 모를 말이 주문처럼 돌아다니자 모두가 아는 체해야만 했다. 제대로 된 정책 전환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영어가 경쟁력'이라는 식의 통념이 선전되었을 뿐이다.

우리가 얼마만큼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필요성에 의존한다. 외국어가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필요한 분야에서 배우면 된다. 이 필요성은 시기에 따라 변할 수도 있고, 정확하게 재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이를 교육한다는 것은 우리 겨레 모두가 미국말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으므로 이는 지나친 생각이다. 미국말 배우기가 얼마나 필요한가란 물음에 대한 생각을 해 보지도 않고 온 겨레가 미국말 공부에 매달리는 것은 슬기롭지 못하다.

외국어에 대한 필요성을 줄이는 데에는 학문에서 번역의 중요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번역 작업을 총괄하고 지원할 국립 번역원을 세우는 것이 좋다. 번역 무른모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 국립 번역원이란 기구를 세우는 것이 짐이 된다면, 이미 있는 국립 국어 연구원을 번역원으로 개편하는 것이 좋다.

이런 논의도 새삼스런 것이 아니다. 사실 이제까지 국어 연구원의 운영을 두고 말이 많았다. 서울대라는 두터운 학맥 때문에 아직도 매체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어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했지만, 그 탄생부터가 적잖은 문제를 안고 있다. 20년 전 군사 정권 시절에 이 희승을 비롯한 한자 혼용파들이 권력을 등에 업고 만든 것으로, 아직도 '서울대 출신의 독무대'임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국립 국어 연구원에 대한 불신은 국어 연구원이 생길 때부터 나타났던 것이다.<주1> 이러한 불신을 의식한 것인지는 모르나 이 희승과 함께 어문 교육 연구회를 이끌었던 남 광우는 '편파적이 되지 않도록 운영을 도모하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주2> 지난 1999년 2월에 권력을 등에 업고 한자 혼용 소동을 벌인 것도 이런 탄생의 비밀을 안다면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사실 국어 연구원은 일본을 모범으로 설립된 것이었다. 그 출발부터 주 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을 부정하고 이와 대결하려는 것이었다. 이 기구는 특정 학맥이 패거리를 지어 관료를 등을 업고 경성제대에서 배운 주장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앵무새처럼 되뇌면서 패권을 유지하는 도구이다. 통일을 대비하는 사전을 만들겠다고 떠들며 출발했으나, 정치적 동기로 계획을 여러 번 변경하였다. 이렇게 나온《표준 국어 대사전》은 이제 폐기 여론이 거세다. 1994년 10월의 문화 인물이었던 이 희승 미화 왜곡 작업, 동양 삼국의 한자체 통일 작업 등 적잖은 말썽을 부렸다.
그러나 이번에 나온 시안을 보면, 이런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특별 추진 과제로 '국어 연구원의 위상을 강화'한다는 말과 함께 구체적인 조직 확대 및 권한의 내용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국립 번역원이지 국어 연구원이 아니다. 이런 국가 기구는 또한 학문 연구에서 국가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여 많은 연구자들을 자리나 넘보고 정부의 눈치나 보게 할 가능성이 크다. 또 그것이 그냥 국어 연구가 아니라 말글살이를 직접 규제한다는 점에서 국가 개입의 확대를 의미한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나라 없던 시기에 민간이 스스로 맞춤법의 틀을 마련한 값진 전통이 있다. 국어 연구원은 겉보기에는 '유일한 국립 연구 기관'이다. 학문 연구 조직에 '국립'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학문 연구의 관료화 및 국가화는 결국 자유로운 연구를 옥죄게 된다. 국립 연구원은 필요한 관료 기구가 아니다. 국어가 발전하려면 이런 불신 받는 국가 기관부터 정리하는 것이 일의 순서이다. 공무원 시험에 국어 인증 시험을 부과하는 정도는 바람직하다. 정권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정부 기관에서 고치고 다듬을 말을 불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을 가능성마저 있다.
이미 40년 전 5월 군사 정변 뒤에 이런 쓰라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산업자원부 같은 데서는 영어로 회의를 하기로 발표한 바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이 기구가 그냥 구색만 갖추고 실질적 기능이 없는 기구가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런 현실로 미루어 보면, 좀 더디더라도 민간의 자율적 운동이 중심이 되고 정부가 뒷받침하는 국어 정책이 바람직하다. 규제와 처벌 중심보다는 우리 말글 사랑을 북돋는 쪽이라야 한다.

더구나 국어 연구원에 설치하겠다는 표준어 사정 위원회에서 새말을 사정한다는 데에는 반대할 수밖에 없다. 경성제대에 수입된 '과학적' 언어학을 아직도 그대로 읊조리는 국어 연구원은 언어의 자연성을 내세워 새말은 애짓는 것이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라는 관점에 서 있으며, 이는 사실상 우리 말글 사랑을 '이념적, 인위적'인 것으로 배척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토박이말로 새말을 짓는 데에 공공연한 거부감을 보여 왔다.

또 이런 관점에 따라 북녘의 언어 정책을 대결과 냉전이라는 관점에서 여론을 왜곡해 왔다. 북녘의 한글만 쓰기 정책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깨치지 못하고 냉전적 대결 의식에 사로잡혀, 한문 교육을 하는 것을 "한자 폐지가 가져다주는 폐단을 그들이 일찍이 체감"<주3>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관점은 북녘에서 나온 사전에 대한 분석이나 우리말에서 나타나는 새말에 대한 비평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식 한자말과 미국말에 오염된 남녘말은 돌아보지 않고, 이른바 '언어 이질화'를 북녘의 말다듬기 탓으로 돌렸다.

"다듬은 말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인위적인 언어 순화가 생명력을 얻는다는 보장은 없다."<주4>

그러나 말다듬기는 한글로만 쓰기의 한 부분이다. 국어 연구원은 언어의 자연성이란 관점에서 우리말의 새말이 만들어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비평하고 있다.《2001년 신어》에서 "떴다방, 묻지마 투자, 야타족, 나홀로족, 깜짝쇼" 등이 어법에 맞지 않거나 부자연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새말 만들기가 '어법'에 어긋난다고 반드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어법'이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바뀌어야 한다. 지나치게 규범적으로 현상을 보는 '어법'이 문제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도 매우 주관적이다. 멀리는 "날틀"로 대표되는 새말에 대한 거부감은 한자 숭배의 또 다른 측면으로서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경성 제대의 '전통'을 고집하는 국어 연구원이 '남북 언어 교류를 활성화'할 수는 없다.

2000년 8월에 허 웅 님과 류 렬 님의 만남을 계기로 남쪽의 잡탕말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 국어 연구원장은 우리 말글 사랑 운동을 '자존심만 내세워 무조건 외래 요소를 배격하려는 자세'라고 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고유성과 외래 요소를 융합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의 한글 전용이 '언어 이질화'의 원인이라 생각한다(《조선일보》2000. 8. 23.).

국어 연구원은 우리 역사와 말글을 보는 관점이 주 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이 살아 있는 북쪽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어 연구원이 '교류 활성화'나 '공동 연구 협의회 구성'에 나서더라도 결과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종합 국어 대사전'을 편찬한다며 북쪽과 만나자고 한 결과를 국어 연구원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제국 대학의 낡은 유물로 남북 대결과 분열의 길을 갈 수는 없다. 국립 국어 연구원을 시민 단체(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가 지난 1999년과 2001년에 우리말 훼방꾼으로 뽑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말글살이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부터 정책이 나와야 한다. 미국말 숭배와 우리말 천대라는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말글 정책의 본질은 외면하면서, 불신 받는 국가 기관이 한 가닥 뉘우치는 빛도 없이 언론이 침묵하는 틈을 타서 스스로의 권한을 강화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일에 골몰한다면 큰 반발을 부를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국민의 동의 없이 법규에 따른 말글살이 규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많은 관심을 일으킬 활발한 논의가 이어져야 한다. ★
<주1>《한글 새소식》제132호(1983. 8.)에 나타난 김 영철 님의 글.
<주2>〈국립 국어 연구원 설치 제안의 이유를 밝힌다〉, 어문 연구, 1983. 9.
<주3>《북한의 언어 정책》(1992. 7.), 170쪽.
<주4>《북한의 국어 사전 분석 3》(1994. 12.)·《북한의 국어 사전 분석 4》(1996. 12.)의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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