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의 미학, 영화 번역의 세계
[퍼온글]
우리가 외국 영화 속 주인공의 한마디에 울고 웃을 수 있는 것은 화면 한 구석의 ‘자막’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제작된 영화라도 자막만 있다면 감상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 자막을 만들어주는 영화 번역가는 고마운 존재다. 영화 번역에 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영화배우 겸 영화 번역가인 조상구(본명 최재현, 53)씨를 만나보았다. 1988년부터 번역을 시작한 조상구씨는 ‘타이타닉’, ‘레옹’, ‘로미오와 줄리엣’, ‘밀리언 달러 베이비’ 등 수많은 외국 영화를 번역한 전문가다.
엄밀히 말하면 영화 번역은 영상 번역의 한 분야다. 영상 번역가는 외국에서 수입된 비디오물이나 영화 등을 우리말로 번역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직업을 총칭한다. 영화 번역은 다시 자막 번역과 더빙 번역으로 분류된다. 영상 번역 중, 조상구씨의 전문 분야인 영화 자막 번역을 중심으로 번역에 대해 알아보자.
번역의 과정
보통 영화가 상영되기 6개월 전에 번역 작업이 시작된다. 번역의 첫 과정은 영화사와의 연락으로 이루어진다. 영화사에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대본을 이메일로 보내주면, 영상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본으로만 먼저 번역을 한다. 이것이 가번역 작업이다. 가번역을 해서 영화사로 보내면, 영화사에서는 자체 심의를 거친 후 비디오테이프를 보내 준다. 그 후 번역가는 영화 속 캐릭터의 특징을 고려하며 본격적인 번역 작업을 한다. 번역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영화 한편을 번역하는데 보통 일주일 정도 소요된다. “영화 한 편을 20, 30번 정도 반복해서 봅니다. 아무리 속도가 빠른 번역가라도 7, 8번은 봐야 해요. 그래야만 더욱 완벽한 번역을 할 수 있으니까요.”
번역 작업이 완성되면 자막실에서 영화 필름에 자막을 넣는다. 자막 한 줄이 화면에 나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넘버링’이라고 말하는데, 영화 한 편에 넘버링이 평균 1200~1700개 정도 들어간다. 길이가 긴 영화는 넘버링 2400, 짧은 영화는 넘버링 700정도다. 자막 작업까지 끝마치면 영화사 사람들과 함께 자체 시사회를 한다. 그 후 영화의 홍보 방향을 정하면서 전체적인 틀을 잡아간다. 세부적으로 자막을 좀 더 순화한다거나, 캐릭터를 더욱 뚜렷하게 나타내는 방법 등의 의논을 한다.
관객 편에서 생각하기
조상구씨는 작업을 할 때 관객들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려고 노력한다. 관객들이 어떻게 하면 쉽고 가장 빠르게 전달 받을 수·있을지를 우선으로 한다. 관객에게 쉽고 빠르게 영화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자막을 읽는 동시에 화면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까지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와 달리 외국 영화는 귀로는 외국어를 듣고 눈으로는 우리말로 된 자막을 보기 때문에 두 가지 행동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외국 배우가 마치 우리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야 돼요. 영화 보는 내내 자막을 읽고 있다는 생각에 방해를 받으면 안 되죠.”
외국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다. 특히 외국 속담이나 인용구 번역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조상구씨는 문화적 차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언어는 사회의 문화를 그대로 반영해요. 번역은 외국어와 한국어, 나아가서 외국 문화와 우리 문화의 다리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직역 혹은 의역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다. 말의 원래 의미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우리 정서에 맞도록 조절한 것이 잘된 번역이다.
외국어보다는 우리말
영화 번역가에게 외국어 실력은 기본이다. 그러나 우리말부터 제대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조상구씨는 번역가들이 영화를 번역할 때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제는 우리말 실력의 한계라고 말한다. “외국어를 아무리 잘해도 우리말을 적재적소에 맞추어 넣지 못하면 번역의 맛이 안 살아요. 저는 영어사전보다 고어사전, 방언사전 등의 우리말 사전을 더 많이 사용하죠.”
영화를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한 그만의 노하우가 있단다. 조상구씨는 ‘ㄴ,ㅁ,ㅇ’의 받침을 사용해서 부드럽고 선한 캐릭터를 더욱 강조한다. 반대로 악역이나 드센 캐릭터의 경우에는 ‘ㄱ,ㅋ,ㄲ’가 들어간 단어들을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어 세상에 찌든 형사가 거친 목소리로 차 한잔하자는 권유를 할 때, “우리 커피 한 잔 할까요?”보다 “우리 커피 한 잔 때릴까?” 라고 번역하는 식이다. 또한, 낱말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조사와 감성을 자극하는 형용사를 풍부하게 사용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내용에 좀 더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영화 번역가가 되려면?
영화 번역가가 되기 위한 공식적인 시험이나 자격증은 없다. 아직은 선배나 아는 사람의 인맥을 통해서 일을 조금씩 익혀나가야 하는 것이어서 경쟁이 치열하다. “철저한 자신만의 노하우 없이는 뛰어들 수 없는 직업이라 초보자들은 일을 얻기 힘들어요.” 외국어에 능숙하다는 것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자막을 찍어내는 자막실과의 의사소통 능력, 관객들의 다양한 눈높이를 맞추는 요령 등을 터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현재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영화 번역가들은 7~8명 정도다. 올해로 경력 18년 차인 조상구씨의 수입은 영화 한 편당 200만원이다. 전문적으로 번역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초보자들은 보통 한 작품 당 30만원부터 시작한다.
“작업을 하려고 비디오테이프를 받고 집에 올 때는 가슴이 두근거려요. 새로운 영화를 다른 사람들보다 미리 본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입니다.” 조상구씨는 영화 번역가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영화를 좋아하는 자세라고 당부했다. 하루에 같은 영화를 10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사람,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라면 영화 번역가가 되기 위한 기본기는 갖추고 있는 셈이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맛깔스럽게 바꿔주는 영화 번역가야말로 언어의 마술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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